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드뷔시 '달빛' : 피아노에 매혹되다.

내가 아주 어렸을 때, 우리 집에는 "피아노 소품의 향연"이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진 녹색 테이프가 있었다.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태교음악으로 쓰던 것이라 하는데, 이것이 내가 사뭇 자랄 때 까지 안방에서 뒹굴어다녔던 것이다. 내가 꼬마였을 때, 우리집은 거실이 아주 추웠으므로 엄마는 집안일을 마칠 때 까지 나를 따뜻한 안방에 가둬두었고, 그럴 때마다 나는 안방에서 조그만 라디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.

녹색테이프에는 '사랑의 꿈'처럼 눈부신 소리로 귀를 끄는 곡들이 참 많았지만, 그래도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이 곡 '달빛'이었다. 딴 짓을 하다가도 이 음악이 나올 때가 되면, 나는 얌전히 앉아 귀를 기울였다. 그리고는 달빛이 쏟아지는 어느 방 안에서, 신비한 마법의 구슬들이 마루바닥을 또르르 굴러가는 꿈을 꾸었다.

나도 크면 저런 소리를 내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출발해서 배우기 시작했던 피아노. 하지만, 그 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나 이 곡을 연주하게 되었을 때 내 손가락에서는 그 마법같은 선율이 나오지를 않았었다. 에이, 피아노 때문이었다 생각하련다. 드뷔시를 맛깔나게 연주하는 데에는 상당한 공력과 아주 좋은 피아노(!)가 필요하다.

마법의 선율을 마법답게 연주해보는 꿈은 어그러졌지만,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릴 때 꿈꾸었던 달빛 방의 영상은 이 곡을 들을때마다 선명하게 되살아난다. 대신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, 방 안의 구슬들은 사람으로 바뀌었다. 방 안은 푸르게 어둡지만, 창문으로는 달빛이 들어와 가득차고, 그 앞에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의 남자와 여자가 서서 손을 잡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모습. 이들이 누군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루돌포와 미미였다! (2005/05/19)


<연주자는 Tamas Vassary.>


ps. 학부 때,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밤 셔틀을 타기 전에 가끔 들르던 학생회관 2층 라운지.
큰 창문으로 달빛이 청아하게 스며들던 커튼 뒤 그 자리, 피아노가 가끔 몹시 그립다.
by nina | 2005/10/13 13:23 | 음악 이야기 | 트랙백(1) | 덧글(10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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Tracked from rollme's me2.. at 2008/06/27 17:09

제목 : 츤데레의 생각
드뷔시랑 내가 물에 빠지면 드뷔시를 내팽겨치고 나를 구하려고 할 사람이 있을까? 있다 해도 그 손을 뿌리치고 이거 미친놈 아냐? 할것이다. 드뷔시는 정말 훌룡한 음악이니까. ...more

Commented by 호빵 at 2005/10/13 17:51
그 피아노에서 가끔 연주를 하곤 했었지...
나 말고 써클애들이 =.=
난 아래에서 토스트 먹고...
안그래도 며칠 전에 연주회 가서 한참 옛날 생각 났었는데...
추억성 게시물 금지!
Commented by nina at 2005/10/15 03:32
그러고보니 저도 낮에 써클애들이랑 갈 때면,
김광석이나 동물원, 여행스케치, 안치환의 노래들을 쳤던 기억이 나요. ^^

근데, 역시 그 곳은 낮보다 밤에 더 멋졌어. :p
Commented by KS at 2005/10/15 08:41
예쁜 달감상이구나. 빨강머리 앤이 생각난다... :-)
Commented by 누나야 at 2005/10/15 11:28
누나야 ^^* 좋으다 ^^*
Commented by nina at 2005/10/22 04:45
KS/ 저만할 때는 진짜 그랬지요. ^^ 그 때는 장롱에 새겨진 꽃봉오리가 살아있고 눈코입도 있어서 나를 몰래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때니까요. 근데 어릴 때는 다들 그렇지 않나요? ㅎㅎ
Commented by nina at 2005/10/22 04:46
누나야/ ^^*
Commented by 호빵 at 2005/10/27 18:22
음... 장롱에 새겨진 꽃봉오리를 생각해 보진 않은 거 같네...ㅎ
대신 로보트 태권 브이랑 마징가 제트가 서울에 있는 줄 알았지. 레이저 광선총은 최하급 무기였고... (만화 보면 외계인이 처들어 왔을 때 숑숑 쏴도 아무 타격이 없자나...) 스파이더맨 보고 왜 나는 거미가 안무나... 하는 생각도...

음악 들을라고 들어 왔다...
오늘 같이 잠 안오는 밤에 참 잘 어울리는 음악이네.
Commented by nina at 2005/10/28 16:53
호빵/ 후훗, 오늘밤엔 제가 잠이 안 오는 차례네요.
포도주 한 잔 - 머그컵에 찰랑찰랑 따라서-_- 블로그에 들어왔어.
불안해서 그런 것 같아요. 주말에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. 시간아, 돌아와. :'(
Commented by 호빵 at 2005/11/02 16:53
무슨 드라마?
내가 추천하나 하면 desperate house wives... 작년에 친구가 추천했을 때 아줌마들 얘기가 머가 잼있겠냐고 안봤는데... 아줌마들 얘기가 은근히 잼있군...
Commented by dlxodnjs at 2008/09/29 00:03
goody good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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